긍휼이 심판을 이깁니다
본문: 창세기 38장 24–26절
보조본문: 야고보서 2장 13절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 야고보서 2:13
핵심 메시지
자신도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가는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유다는 동생을 팔아 자신이 살려고 했습니다.
변화된 유다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과거의 유다는 아버지의 슬픔을 이용하여 자신의 죄를 감추었습니다.
변화된 유다는 아버지가 다시 슬픔에 빠질까 염려했습니다.
과거의 유다는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자신을 지켰습니다.
변화된 유다는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을 살리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긍휼을 경험한 사람의 변화입니다.
긍휼을 경험한 사람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로 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회복의 길을 열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파를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5절은 예수님을 “유다 지파의 사자”라고 부릅니다.
유다가 완전해서 예수님의 계보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다말의 인생에 상처가 없어서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상처가 있는 사람을 긍휼로 붙드시고 구원의 약속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완전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인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붙드는 이야기입니다.
소제목
- 긍휼이 없는 사람은 남의 죄만 크게 봅니다.
- 긍휼은 진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게 합니다.
- 긍휼을 입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들어가는 말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에게 긍휼이 있습니까?”
긍휼은 단순히 상대방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처지에 서서 그의 아픔과 형편을 이해하고, 정죄하기보다 회복할 길을 열어 주는 마음입니다.
긍휼은 죄를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덮어 주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죄를 분명히 보면서도, 자신 역시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죄인임을 기억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야고보서 2장 13절은 말씀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오늘 본문에는 처음에는 긍휼 없이 며느리를 심판했지만, 자신의 죄가 드러나자 심판을 멈추고 잘못을 인정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유다입니다.
창세기 38장은 읽기에 편안한 본문이 아닙니다. 유다의 가정에서 일어난 매우 부끄럽고 복잡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성경에서 삭제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믿음의 조상들을 완벽한 영웅으로 꾸미지 않습니다. 그들의 죄와 실패를 그대로 기록합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을 회개시키고 구원의 역사에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배경
유다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창세기 37장에서 동생 요셉을 죽이지 말고 상인들에게 팔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 창세기 37:27
유다는 요셉의 생명을 구하려는 순수한 목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을 죽이는 대신 팔아서 이익을 얻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동생의 고통과 아버지의 슬픔보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웠습니다.
그 후 유다는 형제들에게서 떠나 가나안 땅에 정착했습니다. 그곳에서 결혼하여 엘과 오난과 셀라를 낳았습니다.
장남 엘은 다말과 결혼했지만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여 죽었습니다. 당시 계대결혼 관습에 따라 둘째 오난이 형의 가문을 이어 주어야 했지만, 오난은 그 책임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오난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네 아버지 집에서 과부로 지내라.”
그러나 셀라가 성장했는데도 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다말은 남편도 없고, 자녀도 없고, 미래도 없는 상태로 방치되었습니다.
결국 다말은 자신을 창녀처럼 보이도록 변장하여 유다를 만났습니다. 유다는 그녀가 자기 며느리인 줄 알지 못하고 관계를 맺었습니다. 다말은 약속한 대가를 받을 때까지 담보물로 유다의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를 받았습니다.
석 달이 지난 후 유다는 다말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외쳤습니다.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그러나 다말이 보내온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보는 순간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하던 심판의 손가락이 유다 자신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긍휼이 없는 사람은 남의 죄만 크게 봅니다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 창세기 38:24

다말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다는 사건을 자세히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다말에게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다말에게 어떤 약속을 했으며 그 약속을 지켰는지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시 가장 가혹한 처벌을 명령했습니다.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이것이 긍휼 없는 심판의 특징입니다.
긍휼 없는 사람은 상대방의 잘못은 크게 보지만, 그 잘못에 자신이 끼친 영향은 보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은 엄격하게 판단하면서 자신의 행동에는 수많은 이유와 변명을 붙입니다.
유다는 다말의 임신은 죄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다말에게 셀라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지키지 않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말에게 미래를 약속한 뒤 오랫동안 방치한 책임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며느리인 줄 몰랐지만 부도덕한 관계를 맺은 사실도 외면했습니다.
그는 다말의 죄를 심판하면서 자신은 의로운 사람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마태복음 7:3
예수님은 죄를 분별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는 살피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죄를 정죄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화: 손전등의 방향
어두운 방에서 손전등을 다른 사람의 얼굴에 비추면 그 사람의 주름과 흠과 먼지가 잘 보입니다. 그러나 손전등을 들고 있는 사람의 얼굴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향했던 손전등을 자기 얼굴로 돌리는 순간, 비로소 자신의 얼굴에 묻은 먼지가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의 흠을 찾아내는 탐조등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며 빛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설교를 들으면서도 자주 생각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남편이 꼭 들어야 하는데.”
“우리 아내가 이 말씀을 들었으면 좋겠다.”
“우리 교회 어느 집사님에게 필요한 말씀이다.”
“우리 직원이 이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네 자신을 보아라.”
유다에게 내밀어진 세 가지 물건
다말은 사람을 보내어 유다에게 말했습니다.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고대 사회에서 도장은 오늘날의 인감이나 서명과 같은 개인의 신분표지였습니다. 도장과 끈과 지팡이는 유다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다말은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유다를 고발하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유다입니다!”
이렇게 외치지 않았습니다. 증거를 조용히 보내고 유다가 스스로 판단하고 고백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긍휼입니다.
진실은 밝혔지만 상대방을 불필요하게 모욕하는 방식은 택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에게 스스로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었습니다.
도장과 끈과 지팡이는 말없이 유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정말 이 여인을 심판할 자격이 있습니까?”
“당신이 지키지 않은 약속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적용한 기준을 당신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
오늘날 우리 앞에 놓이는 증거는 고대의 도장과 지팡이가 아닐 수 있습니다.
내가 보낸 문자일 수 있습니다.
내가 작성한 문서일 수 있습니다.
가족에게 반복해서 했던 말일 수 있습니다.
지키지 않은 약속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남겨 놓은 상처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이 문제에 나의 책임은 전혀 없는가?”
“나는 약속을 지켰는가?”
“나는 상대방의 형편을 충분히 들었는가?”
“나도 같은 기준으로 심판받는다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긍휼은 죄를 가볍게 보는 태도가 아닙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설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잘못을 보았을 때 곧바로 “끌어내라, 심판하라”고 말하기 전에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둘째, 긍휼은 진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게 합니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 창세기 38:26

유다는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보는 순간 그것이 자신의 것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순간 유다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권력을 이용하여 증거를 없애고 다말을 계속 심판하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다말에 대한 심판을 멈추는 길입니다.
유다는 두 번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여기서 “다말이 옳다”는 말은 다말이 모든 면에서 죄가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사건에서 다말보다 유다 자신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을 인정한 말입니다.
유다가 그 이유를 직접 말합니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유다는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았습니다.
“다말이 나를 속였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상황이 복잡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아내를 잃고 힘든 때였습니다”라고 합리화하지 않았습니다.
“다말도 잘못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물타기하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분명하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하지 아니하였다.”
이것이 회개의 출발입니다.
후회와 회개의 차이
후회는 결과가 고통스러워서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후회하는 사람은 말합니다.
“왜 내가 들켰을까?”
“왜 이런 결과가 생겼을까?”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피할 수 있을까?”
그러나 회개하는 사람은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잘못했는가?”
“내가 누구에게 상처를 주었는가?”
“이제 무엇을 바로잡아야 하는가?”
사울 왕도 사무엘의 책망을 듣고 자신이 죄를 범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백성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세워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죄의 결과는 두려워했지만 자신의 명예는 내려놓지 못했습니다(삼상 15:24–30).
반면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 사무엘하 12:13
다윗의 죄가 가벼웠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한 무거운 결과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죄를 숨기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자리에서는 돌아섰습니다.
유다도 자신의 명예가 무너질 수 있는 상황에서 공개적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그 고백으로 유다의 체면은 무너졌지만 다말의 생명은 살았습니다.
긍휼은 자신의 체면보다 상대방의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화: 잘못된 길을 인정해야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운전하다가 길을 잘못 들었을 때 가장 위험한 태도는 계속해서 “나는 길을 잘못 들지 않았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내비게이션이 계속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라고 알려 주는데도 그것을 무시하면 목적지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잘못된 길에 들어섰음을 인정하는 것은 패배가 아닙니다. 바른 목적지로 돌아가기 위한 유일한 출발점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제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제가 상대방의 형편을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 판단이 교만했습니다.”
“제가 먼저 사과해야 합니다.”
이 고백을 하지 않으면 관계의 회복도 시작되지 않습니다.
회개에는 행동의 변화가 따라야 합니다
본문 마지막에는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는 그를 가까이하지 아니하였더라.”
유다는 말로만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관계를 중단했습니다.
성경적 회개에는 세 가지 과정이 있습니다.
- 죄를 깨닫는 것
-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
- 죄에서 돌아서 행동을 바꾸는 것
죄를 깨닫고도 인정하지 않으면 완고함입니다. 죄를 인정한다고 말하면서 행동을 바꾸지 않으면 입술뿐인 고백입니다.
참된 회개는 삶의 방향을 바꿉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뒤 단순히 “제가 욕심이 많았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 누가복음 19:8
잘못한 말에는 사과가 따라야 합니다.
지키지 않은 약속에는 이행이 따라야 합니다.
부당하게 취한 것에는 반환이 따라야 합니다.
상처 입힌 관계에는 회복을 위한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앞에도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놓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때 우리가 해야 할 말은 “그러나 저 사람도 잘못했습니다”가 아닙니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책임을 피했습니다. 이제 돌이키겠습니다.”
그 고백에서 회복이 시작됩니다.
셋째, 긍휼을 입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창세기 38장에서 유다의 인생이 끝났다면 그는 부끄러운 실패자로만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유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말은 베레스와 세라라는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베레스는 훗날 다윗 왕의 조상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도 그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 마태복음 1:3
성경은 다말의 이름을 감추지 않습니다. 유다의 부끄러운 사건도 삭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의 죄와 실패보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더 크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선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죄인이 회개하여 돌아올 때 그 사람의 실패가 인생의 마지막 결론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유다에게 나타난 변화
유다의 변화는 창세기 44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과거의 유다는 동생 요셉을 팔자고 제안했습니다. 요셉이 노예로 끌려가든 말든, 아버지 야곱이 슬픔에 빠지든 말든 자신의 유익을 우선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후 애굽에서 막내 베냐민이 붙잡히게 되자 유다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유다는 애굽의 총리 앞에서 간청합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 창세기 44:33
과거의 유다는 동생을 팔아 자신이 살려고 했습니다.
변화된 유다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과거의 유다는 아버지의 슬픔을 이용하여 자신의 죄를 감추었습니다.
변화된 유다는 아버지가 다시 슬픔에 빠질까 염려했습니다.
과거의 유다는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자신을 지켰습니다.
변화된 유다는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을 살리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긍휼을 경험한 사람의 변화입니다.
긍휼을 경험한 사람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로 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회복의 길을 열어 줍니다.
창세기 38장 한 사건만으로 유다의 변화가 모두 완성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는 고백은 자기중심적인 유다가 책임지는 사람으로 변해 가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화: 깨졌지만 버려지지 않은 그릇
금이 간 그릇은 한 번도 깨지지 않은 그릇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숙련된 장인은 금이 간 그릇을 버리지 않고 수리하여 다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수리된 흔적은 그릇이 깨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깨졌지만 버림받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한다고 과거의 모든 결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 역시 자신의 행동에 대한 기억과 책임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한 죄인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상처 입은 인생을 고치시고, 다시 책임을 맡기시며,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에 사용하십니다.
유다 지파에서 오신 예수님
야곱은 훗날 유다를 축복하며 말했습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 창세기 49:10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파를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5절은 예수님을 “유다 지파의 사자”라고 부릅니다.
유다가 완전해서 예수님의 계보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다말의 인생에 상처가 없어서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상처가 있는 사람을 긍휼로 붙드시고 구원의 약속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완전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인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붙드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로마서 5:8
예수님은 우리가 깨끗해진 다음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거가 부끄럽다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을 핑계로 죄를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긍휼을 입었다면 이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말은 유다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그중 베레스를 통해 이어졌습니다. 베레스의 후손 가운데 보아스와 이새와 다윗이 태어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3절은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고 다말의 이름까지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이것은 유다와 다말의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죄와 뒤틀린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중단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흠 없는 사람들만의 명단이 아니라, 죄와 상처를 넘어 구원의 역사를 이어 가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기록입니다.
마태복음 1장 3절이 이를 명확하게 기록합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 마태복음 1:3
계보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다 + 다말
→ 베레스
→ 헤스론
→ 람
→ 아미나답
→ 나손
→ 살몬
→ 보아스
→ 오벳
→ 이새
→ 다윗 왕
→ 솔로몬 계열
→ 요셉
→ 예수 그리스도
구약에서도 동일한 계보가 확인됩니다.
- 창세기 38:27–30: 다말이 베레스와 세라를 출산
- 룻기 4:18–22: 베레스에서 다윗까지의 계보
- 역대상 2:4–15: 유다·다말·베레스에서 다윗까지의 계보
- 마태복음 1:3–16: 유다와 다말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의 족보
특히 주목할 점은 유다의 다른 아들이 아니라 다말에게서 태어난 베레스가 메시아 계보를 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이것을 “유다와 다말의 행동이 정당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다”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창세기 38장은 유다의 무책임과 성적 잘못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다말이 나보다 옳도다”라는 말도 다말의 모든 행동이 절대적으로 의로웠다는 뜻이라기보다, 이 사건에서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유다의 책임이 더 컸다는 인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와 뒤틀린 상황 속에서도 구원의 약속을 중단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은 다말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생략하지 않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흠 없는 사람들만의 명단이 아니라, 죄와 상처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의 역사를 이어 왔다는 증언입니다.
따라서 셋째 대지는 이렇게 정리하면 가장 정확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회개한 사람의 실패까지 구원의 역사에 사용하십니다.
유다의 실패가 예수님의 족보를 만든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이 베레스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결론: 나에게 긍휼이 있습니까?
처음의 유다는 말했습니다.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그러나 자신의 죄를 발견한 유다는 말했습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유다의 변화가 있습니다.
“저 사람을 심판하라”에서
“내가 잘못했다”로 바뀌었습니다.
“저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에서
“내게 더 큰 책임이 있다”로 바뀌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내가 살겠다”에서
“내가 희생하여 다른 사람을 살리겠다”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긍휼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말하기 전에 네 자신을 살펴보았느냐?”
“너는 상대방의 사정을 충분히 들었느냐?”
“너는 하나님께 받은 긍휼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있느냐?”
“너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회복할 기회를 주고 있느냐?”
긍휼은 죄와 불의를 방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을 밝히되 사람을 파괴하는 방식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올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행위대로만 심판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긍휼을 받은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긍휼 없는 심판을 내릴 수 없습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다른 사람을 향해 들었던 심판의 돌을 내려놓읍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먼저 자신을 살펴봅시다. 잘못을 발견하면 변명하지 말고 인정합시다.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긍휼을 다른 사람에게도 베풉시다.
그때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 정죄가 아니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마무리 기도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은 크게 보면서 자신의 죄와 책임은 보지 못했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다른 사람을 향해 심판의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발견하게 하옵소서.
잘못을 깨달았을 때 변명하거나 책임을 돌리지 말고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게 하옵소서. 말로만 회개하지 않고 행동을 바꾸며, 상처 입힌 사람에게 사과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게 하옵소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용서와 긍휼을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도 긍휼과 회복의 기회를 베풀게 하옵소서.
과거의 유다를 변화시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으로 사용하셨듯이, 우리의 실패도 회개와 은혜를 통해 다른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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